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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로봇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당히 발전을 거듭해 로봇을 넘어 사람을 닮은 기계들이 쏟아져 나온다.
로봇 개, 안내 로봇, 인간을 대신해 수술해 주는 로봇, 위험한 현장에 투입되는 로봇 등 일상생활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가정에 밀접한 관계에 있는 로봇은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어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언뜻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https://blog.kakaocdn.net/dn/cqRC3T/btrECzP5Lwl/rhios3aCFuDYRMfgDR23vK/img.jpg)
만약, 인간 형태의 로봇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하고, 고통을 가한다면 로봇에게 윤리를 적용해야 할까? 먼저, 윤리를 정의해 보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규범이나 도덕의 원리, 인간의 올바른 행동과 정의, 좋은 삶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을 대신해 더럽고, 귀찮은 일을 로봇에게 맡기는 건 질 좋은 삶을 바라는 마음일 테고, 또 로봇이 더욱 발전해야 정의가 올바르게 된다. 그래서 윤리가 올바로 되려면 로봇의 발전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인간 형태의 로봇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는 고통을 느끼면서 노동을 하는 로봇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기뻐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로봇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로봇에게 윤리를 적용하진 않는다. 그럼, 어떨 때 윤리를 문제 삼는 것일까?
인간에게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부분이지만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 똑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윤리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 인간에게 고통을 주면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이 다른 동족에게서 느끼는 고통보다 같은 동족에서 느끼는 고통이 더 크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더 큰 고통이 뒤따른다. 따라서 전쟁을 통해 서로를 죽일 수 있는 것도 고통을 덜 느끼기 때문이며 고통이 클수록 더 자주 윤리가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한국 사회는 개식용에 그렇게 반기지 않는데,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일까 교감을 갖는 사람들이 식용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이때 어김없이 윤리가 거론된다.
또 여성만이 갖는 자궁탈출증의 경우 자궁이나 방광, 직장과 같은 장기가 정상 위치에서 벗어나 질을 통해 밑으로 처지거나 질 밖으로 빠져 나오는 질환으로 먼 중세시대 이전부터 여성들을 고통 받게 했는데, 수술을 통해 삶의 질이 개선되어 행복한 삶을 갖게 되었다면 여기서 삶이 나아졌고, 고통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윤리적이라 표현한다.
예나 지금이나 윤리는 여전히 이익에 치우쳐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요양(병)원의 경우 치료목적으로 신체억제대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노인의 신체 일부 또는 전체를 강제로 구속하는 행위는 폭력에 해당된다. 치료 목적이 있고, 살리려는 이유가 존재하지만 분명 윤리에 어긋난다.
반려동물의 경우 가족처럼 생각한다면서 개식용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보면 개의 목에 줄을 자연스레 채우는 모습이 노인에게 신체억제대를 채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려동물을 보호한다는 이유는 좋지만 채찍을 닮은 목줄이나 쇠사슬, 또는 위압감을 주는 몽둥이를 쥐고 있을 때 반려동물은 두려움에 떨며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윤리를 문제 삼는다. 이 모든 건 고통에서 비롯되므로 윤리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란 분명 이익에 치우쳐있다. 코로나를 치료하겠다며 보호자나 간병인조차 출입을 제한해 감금시키거나 간호사의 관리가 되지 않는다며 신체억제대나 기타 약물을 투여하려는 행위가 어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잘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보호자라는 사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놀라지 않는다. 이는 익숙해진 환경 때문일 것이다.
익숙해져있다는 건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당신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배고픔에 굶주려 울부짖는다. 많은 돈을 벌기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이가 있는가하면 부모의 재력덕분에 호화생활을 즐긴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가 하나 없다.
윤리를 논하는 자들이 알고 보니 이익을 추구하며 거짓 윤리를 앞세우는 구나.
전쟁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도 오히려 무기를 지원하겠다니,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가치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생산인구라 표현하거나 국가경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아들딸들의 출산을 장려한다. 많은 상품을 생산해 되팔기를 반복해 이익을 챙기면서 오염된 공기나 식수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묻는다. 자연을 훼손한 이들이 동식물이 설 자리가 잃어 가는데도 책임을 자연에게 돌리는 구나. 작지만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 윤리는 과학의 진보를 더디게 할뿐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감각은 어떨까? 과거에는 웃음을 흘린다는 이유로 엄중한 처벌을 받거나 불륜이나 동성애, 일부다처제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성적 문제에 죄의식을 갖도록 가르친다. 좋은 예가 정조대 정도가 될 것 같다. 정조대는 자신의 아내를 성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채웠다는 속설이 있고,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의 자위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거나 성폭행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엄연히 성폭력에 해당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 폭언, 갈취 등 다양한 범죄에 노출되어 있고,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되므로 보이지 않는 족쇄로 채워져 있는 게 분명하다. 또한 원치 않게 태어나 행복은 잠시 뿐이고, 고된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운명을 어떻게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과거, 인간복제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윤리가 거론되었지만 당시 반갑게 맞이한 이들이 몇 없었다. 단지 종교적인 이유일 뿐이다.
인간복제는 단순히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복제 기술을 허용하면 불치병, 훼손된 신체, 생명연장 등 다양한 분야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이므로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과 분명 윤리와 일치된다. 연예인을 닮고 싶어 얼굴 성형하는 거나 인간복제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가 무너질까 두려워서일까?
어쨌든 세계가 정의하는 윤리는 이익에 치우쳐 있는 게 분명하다. 거짓 윤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방해만 아니면 빠른 과학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실례로 일자리가 없어질까 봐 기계를 거부하는 지역이 실제로 있다. 하지만 이들을 어리석다고 할 게 아니라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게 무엇인지 깨닫기만 하면 우리가 겪는 고뇌, 슬픔과 같은 고통은 점차 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윤리의 완성이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낮아질 때 행복의 새싹이 솟아나면 행복의 파라다이스가 가까워질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하겠다.
palms@ coconutpalms.info
참고: 위키백과
참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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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코코넛 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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