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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지성을 측정하는데 있어 어떤 방법이 좋을까? 아니 지성은 왜 측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지성이 뛰어난 사람을 이용하면 과학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고, 사회를 좀 더 조직적이고 유연하게 구성할 수 있다. 지식, 이해, 탐구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지성은 창조와 비견해도 될 만큼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지성인은 탐구력이 매우 탁월해서 강제성이 없어도 스스로 깊이 있게 파고들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과제를 주면 스스로 연구해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싶어 한다. 바로 이들의 습성을 이용하면 사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예를 들어 학문, 진리를 통틀어 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깊이 있게 파고들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성취감을 맛보게 되고, 우리는 이들이 발견한 것들을 사회에 적용해주기만 하면 된다. 한 마디로 이들을 이용해서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어렸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지성을 측정하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일반인들과 분리한 공간에서 지적능력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지성이 이룬 업적

지구가 평평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뜬금없지만 아직까지도 지구가 평평하다는 설을 믿는 단체가 있다. 나사의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니 말이다.


지구가 둥글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누구일까? BC 624년 탈레스가 바다 항해를 바탕으로 지구가 둥근 방패모양이라고 처음 주장하였고, 그 뒤 BC 194년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막대기를 수직으로 꽂으니 낮과 밤의 차이에 따라 그림자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를 통해 지구의 둘레를 구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수의 뛰어난 지성인의 노력 덕분에 놀라운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나사의 음모론을 믿고 있는 단체는 실제로는 지구는 평평한데, 나사의 거짓 주장으로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면서 현재 많은 관련 영상들을 배포하고 있다.


문득 관련 영상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이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나사의 조작근거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판단할 근거는 많다.


예를 들어 멀어져가는 배의 수평선에 걸쳐져 있다거나 항구로 들어오는 배는 돛대부터 보인다. 배를 타고 한 방향으로만 가면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사람의 그림자가 길어지거나 작아지는 것도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며, 비행기를 타고 상공을 날고 있을 때 수평선을 보면 호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월식에서 확인 가능하다.


지구 평평설 근거를 받아들이는 건 어떻게 보면 무지함에서 나온다.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으니 지구 평평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는 주장을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은 행성의 위치가 관측결과에서 크게 벗어난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따라 예측한 행성의 위치는 정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후 1609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여 태양 중심설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만들었고 점차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인 지식덕분에 태양 중심설을 믿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 역시 소수의 뛰어난 지성인에 의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가 모여 은하계를 이루며 또 무수한 은하계가 집단이 되어 은하단이 존재하는데, 유일하게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와 지구 중심설을 주장한 과거의 사람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진화론이나 창조론, 또는 UFO 존재도 같은 맥락이다. 지구에 생명체가 유일하다는 건 실제로 뇌가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도 논리적으로 지구가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다.


당연한 예기지만 현재의 과학을 근거로 진화론을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과학은 완전하지 않은 모순덩어리인 집합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과학으로 측정된 기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증명하려니 모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분명 현재 과학을 너무 신뢰한 탓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과학을 이용하지 않고도 코페르니쿠스처럼 뛰어난 지성을 이용하는 방법을 안다면 과학적 진보는 틀림없다.



집단지성의 문제점

집단지성은 1910년 미국 하버드대학의 곤충학자 윌리엄 모턴 휠러가 처음 제시하였다.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또는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 집단의 지혜가 소수 전문가들의 지혜를 능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있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은 쓸모없어보여도 작은 지식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뛰어난 지적수준이 되는 건 틀림없지만 결정권을 결코 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문제점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거다. 우리는 지도자를 선택할 때 재량을 보지 않고 술을 가장 많이 산 후보나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선택하며 가장 많은 표를 얻는 후보가 대표가 된다. 특히 유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리석은 군중이 되는 함정도 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집단지성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판단이 가장 뛰어난 인간에게 결정권을 맡기는 것이다.


전체 인구에서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전체 인구 중 상위 20~30%가 평균 이상의 지성인이라면 이 중 최상위 1%가 탁월한 지성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대로 하위 20~30%가 지성 수준에 미달하고, 이 중 최하위 약 1%가 백치거나 저능아로 보고 있다.


구성원에 저능아가 있고 같이 의논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분명 끊임없이 방해받게 된다. 대화가 오고가면서 저능아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의 논쟁을 벌여야 하고, 일의 진행은 더디게 흘러가면서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으니 협의 점은 더욱 찾기 힘들다.


사회는 여태 저능한 인간으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를 받아왔기 때문에 느리게 진보한 건 사실이다.


설사 우리가 몰랐던 귀중한 정보를 저능아가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에겐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지식에 불과하지만 가치 있고 유용한 지식으로 가공하고 활용할 줄 아는 그룹이 최상위 1%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18세기 사람에게 비행기나 우주선, 자동차에 대한 가치를 설명한다면 이 물건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이들이기에 비웃으며 마차를 고집할 것이다.


3D 프린팅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의학, 건축, 우주항공, 국방 등 다양한 곳에 적용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제조업을 넘어 문화재나 유물 복원 등 예술분야에까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다리 철근 구조물을 출력하고, 세포를 찍어내거나 며칠이 걸렸던 옷 제작 시간도 이제는 단 30분이면 사용자에 따라 맞춤 형태로 쉽게 제작하고 찍어낼 수 있다. 엔진을 제외한 자동차를 프린터로 찍어내는데 성공했으며 곧 엔진도 프린터로 찍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현실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일반적인 프린터에 대한 지식만 갖고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3D 프린팅 기술 적용범위에 대해 설문을 실시한다면 대부분 거대한 출력물을 상상하며 활용범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의학이나 건축, 제조업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인은 창조성이 높아서 다양한 활용 범위를 생각해 낼 것이다.


바로 현명한 판단을 하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갖추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상상이 없으면 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문제로 손해가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빨리 포기하는 결정도, 가능성을 키워주는 역할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올바른 길로 인도(引導)하는 것도, 모두 현명한 판단에서 나오며, 이들에게 결정권이 주어진다면 사회는 더욱 더 풍요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



좋은 선택

현명한 결정을 내리려면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지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보조적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근대 가장 큰 창조물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좋은 결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둔한 자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아왔고, 국민들은 원치 않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해 왔다. 만약 충분히 지성적인 인간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고집했을 것이다.


전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알기에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근대 올림픽을 추진해 왔다. 올림픽 경기대회의 이상은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완성과 평화의 증진에 있다. 따라서 올림픽 경기를 통해 승리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며 성공보다는 노력하는 것이라고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이 말하였다.


만약, 쿠베르탱이 올림픽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움을 갖고, 언어가 달라서 두려움을 갖는다. 오늘날은 우주로부터의 어떤 것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건 그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으니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근대 올림픽을 통해 다양한 피부색과 문화적 차이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이해하면서 인종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하지만 여전히 우주로부터의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다. 그렇지만 이 역시 시간이 흘러 더 먼 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과학적 진보를 이루면 지식들이 쌓여 우리의 두려움을 종식시켜줄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서로의 두려움을 없애준 올림픽 덕분에 세상이 좀 더 유연해질 수 있었고,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건 지성을 가진 이의 좋은 선택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징기즈칸보다는 쿠베르탱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누구는 인터넷이야말로 가장 좋은 창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당연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인터넷은 신경망을 연결시켜주듯 서로를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좋은 도구이며 통신을 통해 다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서로를 잘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배우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인터넷은 그들을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지식을 습득하기에 좋은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며 또, 통신을 통해 정보를 서로 공유할 수 있어서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만약, 우둔한 무리에게 창조성을 통제되어 왔다면 지금도 여전히 마차를 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직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지성을 가진 이들 뿐이다.



지성에 대한 오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지성이 될 수 없다. 지성이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내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 조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제시하거나 아니면 높은 상상력으로 과학적 발견을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창조라고 하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정형화된 틀에 짜여진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은 계속해서 변화하는데, 정적인 지식만을 주입해서 창조성을 발휘하기 어렵고, 오히려 창조를 방해한다. 따라서 뛰어난 기억력으로 아무리 많은 지식을 외워도 창조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상대의 성향만 알아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 가능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상대의 표정, 어투, 제스처, 눈빛, 그리고 상대의 감정 변화를 종합하면 많은 일들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 바로 관찰이다. 오랜 관찰을 통하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어느 학습지 교생에게 벌어진 일이다. 교생은 매일 아이들을 관찰해서 원인, 해결책, 방향을 제시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교생은 아이들 하나하나 관찰해서 과제를 제출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은 관찰 기록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아이들에 대한 성격이나 문제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특히 담당 선생님도 몰랐던 부분까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들은 첫날에 일어난 일이다.


상대의 정보를 가지고 현재의 문제나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예측 가능한 일은 많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종합해 현재의 문제나 미래를 예측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당한 정보가 바탕이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각자의 성격, 성향, 습관, 표정, 어투, 눈빛, 두발 상태, 그리고 서로의 상관관계를 종합해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국가는 예측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주변 국가를 종합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각 국가의 관습, 언어, 지형, 온도, 수입 등 다양한 정보를 습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부한 지성을 갖춘 자에게 결정권을 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겸손에는 지성이 있다.

지성이 충분하거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성을 측정하기에 좋은 기준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성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덕목 중 하나이며 객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시기심으로 분개하거나 질투심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언제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겸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을 때 겸손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겸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러 의미 중 하나가 바로 배움이다.


자연을 생각지 않고 무분별하게 개발한 탓에 환경은 형태를 찾을 수 없고, 힘없고 작은 동물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이기심으로 이유도 모른 체 실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 행위는 분명 존중과는 다르다.


존중은 높이어 귀중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계급, 성별, 인종, 나이에 상관없이 대상을 존중해주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숱한 전쟁을 치른 원인이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협박, 폭력, 교만, 자만, 교활, 시기, 오만 등 존중과 반대되는 모든 행위들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상대의 나이가 많거나 적다고 해서, 아니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언이나 비판을 무시하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에는 나이나 계급, 학력에 경계가 없다.


14세기 에티오피아의 환관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특정한 성경 구절의 뜻을 잘 몰라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제자 빌립이 그에게 “당신이 읽고 있는 구절의 뜻”을 아느냐고 묻자 그는 “누가 나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만약, 환관이 신분을 내세우며 빌립을 무시하고 귀 기울이기는커녕 비웃고, 책잡으려 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답이지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 질문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에게 배움이란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어느 날 중학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8차선 도로를 종횡무진하며 길을 건너는데,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그런데, 탑 차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아이를 치여 버렸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그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매우 빨라서 차를 피해 다니는 것으로 착각했었던 것 같다.


아이의 행동은 자만이고, 자신을 과신한 탓이다. 남들보다 월등한 것도 아닌데, 월등하다고 생각해 버렸으며 자신을 좀 더 깊이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다. 자만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좁아지게 하는 것이므로 겸손과는 반대다.


무언가 하려고 하면 한두 명쯤은 꼭 불가능하다며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을 가능하다고 말하며 실제로 일을 쉽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지식의 차이를 많이 느낄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실제로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며 자신의 상황을 겸손히 받아들였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했을 때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존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된다.


겸손을 통해 인성을 알 수 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성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들을 가르치고 올바로 인도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방법으로 지성을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


문제해결능력

지성은 인간의 욕구와도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에는 다음 욕구가 포함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 및 소속감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이 욕구를 측정함으로써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느냐에 따라 타인의 문제해결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잠잘 곳이 없고, 배고픔에 굶주려 있다면 그는 부족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려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리적 욕구가 부족한 사람에게 금전에 관한 결정권을 준다면 횡령으로 이어지게 된다.


애정 및 소속감의 욕구도 같은 논리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친분을 쌓고 우정과 소속감에 관심을 갖는다면 관심 정도에 따라 연관된 역할을 맡기면 된다. 하지만 소속감에 관심이 높지만 역량이 부족하다면 부정행위에 빠져들 가능성을 염려해야 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이나 친구, 동료를 배신한다면 자신의 소속감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 있고, 지식이 충분하다면 중요한 결정에도 치우침 없이 공평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지성을 평가할 수 있는 질문

상대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주관적인 질문을 하고 문제에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서슴없이 대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전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대답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통해 도덕심과 지식수준, 그리고 폭력성이나 자기통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각자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을 한다면 창조성으로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답변이 너무 단순하다거나 일반적인 답변을 한다면 평균이거나 그 이하 지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질문을 통해 얻게 되는 답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두뇌를 이용해 얻어진 결과물이므로 그 사람의 지성을 평가하는데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표현에 서투른 사람도 있으므로 시험지를 통해 답변을 받을 수도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두뇌를 이용해 지성을 최대로 끌어올릴 것이다. 


프랑스 고등하교 졸업 시험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다음은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의 일부분이며 주관식으로 출제된다.

  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2. 꿈은 필요한가?
  3.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참고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 몇 가지 만들 수 있다.


  1.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2. 당신에게 100억 원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3.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통해 겸손, 인성을 알 수 있고, 죽음의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목표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를 평가 가능하다. 당연히 심리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 수도 있다.


“약속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각자 자신의 생각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약속은 언제나 깨질 수 있다. 아무리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면 약속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 질문만으로 지성과 인성을 알 수 없다.


만약,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경제적인 지원을 대가로 부정행위를 요구하고, 이에 쉽게 응한다면 올바른 지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결정 앞에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면 타락도 매우 쉽기 때문이다.

 

예수의 광야의 유혹은 좋은 사례가 된다. 예수는 40일 동안 금식하고 있었는데,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 그를 유혹한다. 가장 지쳐있을 때 그의 약점을 노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흔들림 없이 그를 물리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유혹하는 자는 또 예수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내 앞에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한다. 


사실 이 모습은 우리 사회에 공공연히 벌어진다.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중요한 문제 앞에서 비리에 쉽게 흔들려 버리면 올바른 결정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분명 지성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비리를 탐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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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코코넛 팜스
과학 오피니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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