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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면 수많은 검사와 처치들이 행해진다. 장기 입원 환자의 경우 수많은 채혈이 이루어지며 여기저기 하다보면 혈관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의 혈관이나 목 아래의 혈관에서 채혈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고령자이고 활동량이 없으면 혈관을 찾기 어려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찾아 임종 직전까지 채혈을 한다.
 

임종 직전인데 채혈을 왜 지속적으로 하는지 의미 없는 검사만 수십 가지다. 한림대 연구팀이 10년간 병원에서 숨진 60세 이상 6천 6백여 명을 분석한 결과 2015년 기준 임종 전 일주일 동안 받은 검사만 1인당 평균 16.6건이나 된다. 죽음을 앞두고 혈액 채취 같은 검사를 적어도 매일 2번 넘게 받은 셈이다. 
 
임종 직전의 검사 항목을 보면 비타민 D 검사, 갑상선 기능 검사, 류마티스 인자 검사 등등 불필요한 검사들로 채워져 있다. 죽음이 코앞인데, 류마티스 검사는 무슨 의미일까?
 
죽음이 문턱이라서 계속해서 나빠지는 상황인데, 의사들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감사를 한다. 원인을 알 수 없으면 더 많은 검사를 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불필요하고 과도한 검사는 죽을 때까지 존엄성의 권리마저 앗아가 버린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서 환자로서가 아닌 실험체로 몸을 맡긴 거와 같다. 생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닌데, 변하는 것은 하나 없는데, 존귀하게 죽을 권리마저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윤리는 사전적 의미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라고 나와 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의 도리이다.
 
한번은 코로나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좋은데, 이게 지나쳐서 신체 억제대를 이용해 치료하려는 행위는 윤리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겠다.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환자로서 보호받을 권리마저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잘 캐어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보호자인데 정작 보호자 없는 병실을 운영하는 것도 환자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불안한 감정에 의해 병세가 악화되어 치료는 더디게 흘러가는 건 다반사이다. 이를테면 가벼운 코로나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잘못된 처치로 중증이 되고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에 누구도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조직에서 적잖게 벌어지고 있는 학대, 폭력, 차별, 편견과 같은 인권이 무시되는 건 부지기수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과연 윤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윤리의 기준

과거 클로네이드 회사에서 인간복제를 주장하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바 있다. 사건의 중심에는 윤리가 거론되었는데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이 파괴된다는 이유에서다.
 

복제인간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점과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는 이유에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파괴하고 결국에 인간사회를 파괴할 것이라 강조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하기 싫고 더러운 일에 자신을 팔고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임신할 때, 또는 출산의 아픔을 겪는다. 국가는 경제를 빌미로 사람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고 고된 삶 속에 병들어 죽게 만드는데도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로봇 한 대로 수백명분의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니 윤리의 모순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한 노숙인에게 음식을 나눠줬다고 불법으로 간주해 체포한 일이 벌어지고, 실수로 사유지에 침입했다고 총으로 쏴 죽일 정도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볼 때 인간복제가 더 윤리적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사회에 익숙해져서일까? 일자리를 로봇에게 밀려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과잉경쟁 속에 서로를 미워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분명 이상한 세계에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 그럼에도 누구도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의 기준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는 윤리를 생각할 때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지를 따져봐야 한다.
 
누구나 평등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누릴 권리가 있음에도 새로운 기술에 대해 항상 편견을 갖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과학적 혜택을 누리면서 과학을 거부하는 시선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 하겠다.
 
팔다리가 잘리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인간복제 기술로 새로운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인공장기보다 새로운 몸이 더 잘 맞을 것이다. 신을 논하기 전에 인간에게 가져다줄 혜택을 먼저 생각해야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으로 일정부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의 과학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데, 수억 마리의 실험동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동물실험은 사람을 대신해 약품의 안정성과 효과를 알아보는 필수 단계지만 실험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개발이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연구 92%가 인체에 효과 없다는 결과가 있다.
 
현재는 실험동물의 희생을 줄이고자 대체 기술이 모색되고 있는데, 세포로 미니 장기를 만들거나, 세포들을 플라스틱 칩 위에 입체로 배치하는 '인공 생체 칩(organ on a chip)' 기술이 부상하고 있다. 3차원 조직은 평평한 접시 위에 세포를 배양하는 방식보다 정확한 인체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정부기관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성실험에서 실험동물 대신 사람의 장기와 같은 형태로 만든 인공 칩을 사용하고 국내에서는 '미니 장기'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세포를 배양해 실험용 미니 장기인 '오가노이드(organoids)'를 만드는 것이다.
 
 

끝으로

실험체로 동물이 학대받고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는 장면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일 뿐 코로나 백신으로 고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느껴본 우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움을 느낀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는 강제성에서 비롯된 상황이라 하겠다.
 
원치 않지만 강제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백신을 맞았다면 이것을 윤리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질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입원을 한 것이나 본의 아니게 실험체로 희생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강제성이 없이 오직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져야 윤리적이라 말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게 자발적 선택이란 게 아이가 사물을 이해할 수준에 이른 만큼의 충분히 성장하였을 때만 해당되며 이때는 무엇을 선택하든 존중해줘야 한다.
 
실제 사례로 2014년 아영은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알게 된 3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을 당할 때마다 돈을 받았으며 이윽고 아이를 임신한 때는 열다섯 살 나이였고, 낳아 기르고 싶어 했던 아영에게 강제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했다. 이후 아영은 남성이 구속되고도 이 남성을 ‘연인’이라고 생각해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사건 이후 1년이 지나 친구 손에 이끌려 십대여성인권센터에 온 뒤에야 피해 사실을 자각했다고 한다.
 
어쨌든 임상시험에 지원해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또는 고통이 심해 자살을 선택하더라도 이 선택을 존중해줘야 하며 반대로 강제적이고 폭력으로 얻어낸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며 비윤리적이라 말해야 한다.
 
윤리의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원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해 고뇌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면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이를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현재는 동물을 도살하지 않고도 수백 명분의 고기를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도달하였다. 이 결과는 노동자 없이도 잡다한 일을 로봇이 자동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일정 부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를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윤리를 앞세우면서 뒤에선 이익을 따지다보니 항상 어긋난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palms@ coconutpalms.info
참고: KBS 뉴스, 한겨레, 조선일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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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코코넛 팜스
과학 오피니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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