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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픽사베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치형태는 민주주의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정치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생활 곳곳에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집단 내에서 우리 민주적으로 결정하자 라는 식의 타협과 비판을 통해 다수결 의사 결정 방식이 민주주의적 요소 중 하나다.


사실 누가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슨 뜻이며 만들어진 계기가 무엇일까?


민주주의 어원은 민중(또는 다수)와 지배의 합성어로 민중에 의한 지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국가의 주인은 왕이나 대통령(또는 소수)가 아니라 바로 국민이란 뜻으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차별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차별 당한다는 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침해되는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 정치란 바로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대부분 주체가 극소수 이였거나 1인 지배형태(독재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1인 지배형태였던 국가에는 계급의 억압과 착취가 만연하게 행해졌고, 국민들은 번번이 무시당하며 존중받기는커녕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말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독재자 주변인물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왕이나 소수의 집단만이 권력을 나눠가진 탓에 불평등하고, 공정하지 못한 행위가 지속되자 곧 많은 사람들이 시민혁명을 일으켰고, 그 후 여러 나라에서 민주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민혁명 후에도 여성들은 물론 농민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얻기 위해 10년간 시위(차티스트 운동)한 끝에 결국 노동자나 농민들도 선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민주 정치도 완벽하지는 않다.


단위가 작은 국가라면 모든 시민이 모여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 정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단위가 큰 국가라면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해서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비용과 시간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고, 대표가 국민을 대신해 정치에 참여하게 한다.


혼자서 혹은 소수가 정치를 한다면 시간과 비용 면에서 효율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형태가 차별적인 계급사회를 만들고, 이것이 곧 자유의 억압과 착취, 불평등을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보장받아야할 당연한 권리임에도 역사적으로 한 개인으로써 존중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다.


혹여나 우리가 뽑은 대표가 법을 무시하면서 멋대로 결정하고, 바꿀 수 없도록 마련한 장치가 헌법이고, 헌법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권리가 보장된다. 또한,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나누어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두었다.


이러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주 정치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에는 어떤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일까?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천재정치가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1999년에 출간된 “천재정치” 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운을 떼면서 오직 지성을 갖춘 사람들만이 권력에 앉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지성이란 상식 또는 창조적 재능과 비교할 수 있으며 농부나 노동자들이 기술자나 학자들보다 높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보통 민주주의가 아닌 선택적 민주주의 천재정치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지성(知性)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넓은 의미로 지각(知覺)이나 직관(直觀), 또는 오성(悟性)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설명한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이해하고 깨닫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창조와 비견할 수 있지만 단순히 지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성은 지식, 이해, 탐구로 요약할 수 있으며 탐구는 많은 호기심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성을 측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탐구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단지 기억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탐구의 보조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천재정치가 말하는 지성인이라면 민주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까? 역사에서 알 수 있듯 1인 또는 소수 기득권자에 의해 지배를 받아온 터라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는 건 아닐까? 민주정치를 받아들인 과정을 보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분명 아니다.


과거에는 힘의 논리를 앞세워 오랫동안 부당한 지배를 받아왔다. 힘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면 힘없는 사람의 의견은 무시될게 뻔하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다면, 자연스레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다.


국가 간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미국과 같은 강력한 국가가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자기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혹은 힘만 앞세워 힘없는 국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지배하려 든다면 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맞지 않다.


우리는 시민혁명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분명 권력이 한쪽으로 쏠려 버린 탓도 있거니와 자유와 평등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져 결국 국가 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가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인과 백인이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그리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있듯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난 개성이 있고 모두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다르거나 생활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하며 내 생각만을 강요한다면 토론이나 대화가 힘들어지게 된다. 내 생각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중요하다.


먼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되 다툼이 생길 때는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며 의견차를 좁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민주주의 결정방법이고, 지성적인 행동이다.


만약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고집한다면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뒤에서 남을 헐뜯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려서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는 행동이 과연 지성적이라 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 현실이 이렇다. 또 선거철이 되면 자주 나오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택한 대표를 무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만큼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외모, 학벌, 재산, 또는 그 사람의 지위 정도가 아닌가, 이 기준이 과연 지성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부분일까?


만약, 지성은 갖추었지만 주변인물을 살인한 이력을 가진 자와 함께 옳고 그름을 논의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한쪽으로 치우쳐 해결하기보다 지식을 토대로 논리적이고 분별력 있게 처리하거나 편파적이지 않게 깊이 있게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지도자가 되기 전에 한 번의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편집증은 곧 무지함으로 연결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반사회성 인격 장애, 편집증 혹은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016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1% 정도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에는 약 50만 명으로 100명 당 1명꼴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약 200만 명이 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정신분열증의 정확한 명칭은 조현병이다. 과거 조현병을 마귀가 들렸다거나 악마의 저주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지금은 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현병 증상은 대개 환각, 망상, 환청을 포함하며 일생동안 단 한 번이라도 걸릴 확률이 1% 나 될 정도로 흔한 질병의 하나다. 흔히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환자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조현병과 유사한 질병 편집증이 있다. 편집증에는 흔히 과민 반응을 보이거나 의심, 불신, 병적인 질투, 복수심으로 나타난다. 과거 편집증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망상장애로 분류한다.


망상이란 질투에 기초한 망상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 즉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판단을 하며 지극히 주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거나 중상모략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해 버리기도 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에게서 사실 확인을 하여도 의심을 쉽게 풀지 못한다.


편집증은 대게 성인기 후반(65세 이후)에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다. 편집증 증상을 보이는 대부분은 소외(疏外)되어 오는 경우가 많으며 노인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젊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만약 자신도 모르게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과연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대표가 된다는 건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사울과 다윗”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윗을 공공연히 죽이려한 인물로 편집성 조현병을 앓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신질환은 분명 판단력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좁아지게 하여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만들고, 이것이 직무 능력마저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어린 아이같이 단순해지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한낱 어린 아이에게 맡겨야 하는가?


노인은 대개 오해를 많이 한다. 왜냐하면 정보가 많이 부족해서다. 유일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도구가 TV 이고, TV 로부터 정치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라면 오직 정치에 대한 정보만 갖게 된다. 이토록 적은 정보로 무엇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더불어 정신질환을 앓는다는 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떻게 타인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념에 맞게 평등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면 최소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


정신질환은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병적 문제와도 같다. 예컨대 세상의 종말을 굳게 믿고 있다면 교주로부터 구원의 열쇠를 얻기 위해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행동이 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종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맹신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문제다.


만약, 우리가 지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한다면 어떤 문제에 의문이 생기면 맹목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끝임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분별력 있게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예측은 폭넓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앞날을 예측하려면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과거의 충분한 자료가 바탕이 된다면 미래를 예측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조선의 어느 ‘부인’이 무속인을 찾아갔다. 며칠째 소식 없는 남편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속인은 한 문자씩 여러 종이에 나눠 적은 종이를 부인 앞에 내어주고, 문자 하나를 골라보라고 일렀다.


고심 끝에 한 문자를 선택해 건네주었더니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노름을 좋아하고 지금은 어느 장소에 있을 것이라 일러주었다. 무속인이 일어준 장소로 가보았더니 정말 남편이 술에 취해 자고 있더라는 것.


이 무속인은 남자의 성향이나 성품을 어떻게 알아 차렸을까? 어디에 머물고 있을 것이란 사실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마 신내림을 받았던 것일까?


부인이 문자가 적힌 종이를 선택할 때 머뭇거림, 목소리 톤, 행동거지, 마음을 살펴 종합해 부인의 성격을 알아차렸고, 이런 성향의 부인이라면 어떤 성향의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무속인이 신이나 조상이 알려주었다고 거짓을 고하고, 재물을 탐했더라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은 그대로 믿어버렸을지 모른다.


중국 고전소설 서유기 속에 등장하는 손오공은 아무리 뛰어 봐도 부처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부처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4계절을 겪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려움이나 즐거움을 겪어보고서야 대략 상대의 윤곽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오공이 어디에 숨든 간에 성품, 인격을 이미 알고 있었던 부처는 손오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어렵게 표현하면 인지력이라고 말한다. 흘러가는 상황을 재빨리 읽어내고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을 현실적으로 예측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인지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모험적인 시도를 자주해보고,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황을 그려가면서 훈련을 자주 해야 하는데, 하나의 정보로 여러 가지 상황을 분석해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다. 인지력은 회사나 소속된 단체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큼 규모 있는 정보 분석이 될 수 있다.


사실 손오공의 능력이라면 천축(인도)에서 불경을 얻는 건 하루면 족하다. 그런데도 삼장법사가 굳이 고행의 길을 선택한 건 세상 인간사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며 좋은 훈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에 있어 직관(直觀)은 창조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직관이란 알고자 하는 어떤 문제에 직면하는 순간 불현 듯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감각, 경험, 판단, 추리 등의 생각을 거치지 않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생각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해답을 얻는 게 직관력이라면 직관을 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직간접적인 경험과 학습을 필요로 한다. 스티브잡스가 많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오직 안정만을 꽤하고 안주하려 했다면 직관은 결코 얻을 수 없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요 사상가다. 그는 카잔 대학을 다니다 중퇴를 했는데, 그 이유가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교육에 실망해서라고 한다. 그럼 창의력이 지성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현실적인 안정을 꽤하려고 교육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공무원에 합격한다면 평생을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안정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세는 창의력을 저해할 뿐이다. 또 스스로 현실에 안주해 버리면 보다 나은 환경은 물론 나중에는 스스로의 고정된 관념에 의식을 속박하게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고정 관념과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창의력과 직관력, 인지력과 지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이 곧 지성과 연결된다. 지금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면 고지식하고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현실에 너무 안주한 나머지 굳어버린 머리(고정관념)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굳은 머리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거니와 더 큰 문제는 변화를 두려워해서 항상 과거에 머물고 싶어 한다.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건 나은 방향을 제시해도 개선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같은 문제가 반복되어도 설사 저항 의지가 있어도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 종류 부류

지성인의 비율은 그야말로 전 세계 인구 중 소수만이 지성인일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은 최악의 인간이 소수에 해당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투쟁”을 저술한 히틀러는 신문 독자를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읽은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 두 번째 그룹은 어떤 것도 전혀 믿지 않는 사람, 세 번째 그룹은 읽은 것을 일단 음미해보고 그 뒤에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이들은 다소 무능하고 무지해서 이해할 능력이 없어 인쇄된 모든 것을 믿어 버리고, 두 번째 그룹은 소수에 해당하며 처음에 첫 번째 그룹에 속했으나 오랫동안 환멸을 겪은 후 이제는 무엇이든 믿지 못한다. 이들은 진실에 대해서 늘 의심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매우 힘들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 그룹은 그 수가 매우 적다. 타고난 소질과 교육에 의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는데, 자신이 아는 지식을 극히 근본적으로 다시 한 번 음미한 뒤 결론을 내리는 이들로서 정신적으로 세련된 두뇌의 소유자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두뇌를 활동시키면서 신문을 읽는다고 설명한다.


개미나 벌 등 사회성 곤충 집단에는 20~30% 정도가 일하지 않는 개체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하지 않는 개체만 따로 모아 놓아도 2:8 비율로 일하지 않는 개체로 다시 나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성인이 20~30% 라면 나머지 70~80% 가 무지하고, 우둔한 자들로 이뤄져 있다. 이상적인 사람들을 따로 모아도 이중 70~80% 가 다시 무지한 자들로 나뉘게 된다. 이것은 단체나 조직 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좀 더 세분화하면 3:4:3 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30% 가 이상적인 두뇌의 소유자들이라면 40% 가 우둔하고 무지한 자들, 나머지 30% 가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회의주의자들이다.


현재 3:4:3 법칙은 생활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상권 분석이나 마케팅 활용에 이용하며 소비패턴을 분석할 때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신제품이 나올 때 무조건 구매하는 사람, 일단 생각해보고 구매하는 사람, 절대로 구매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뉠 수 있다.


그림 1


[그림 1]의 중간 그룹은 주입식 교육 덕분에 지식은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무능하면서 무지한 편에 속한다. 이들은 저항 의지는 갖고 있으나 생각만 할 뿐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며 상위, 하위 그룹의 권력에 따라 이동하므로 양떼와 같다. 유동성과 고지식의 중간 두뇌 소유자이다.


안정된 위치에 오르게 되면 대부분 두뇌 활동을 멈추며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고정된 관념에 자신을 가둬 버려 오히려 퇴보한다. 보통 두뇌 활동이 크지 않은 게 특징이다.


하위 그룹은 소수지만 늘 의심하고 경계하는 무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1% 가 상당히 고지식하여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으므로 원시적이며 폭력적이다. 특히 어떤 높은 자리를 꿰찰 가능성이 높다.


또한 늘 고리타분하여 대화와 타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동물적 본능에 충실하며 집착이 강하고 자기 통제력이 낮은 편에 속한다.


이 그룹에 속한 무리들은 똑같은 실수를 하고도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절대 알지 못하며 또한 관심도 없다. 그래서 생활에 변화가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상위 그룹은 이상적인 두뇌의 소유자이며 유동성 두뇌를 가졌다. 그래서 자신의 두뇌 대부분을 활용할 줄 알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실수를 인정할 줄 안다. 이중 상위 1%는 매우 탁월한 지성을 갖추고 있으며 동물적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무리와는 달리 자신을 통제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 순수한 면을 갖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의식을 속박하지 않아서 사고가 자유롭고 유동적인 두뇌를 가진 게 특징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다. 타인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지, 어느 분야의 지식이 더 많은지, 어떤 점이 장점인지 등등 자신을 알아갈수록 타인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 내면의 변화를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한 것과 같다.


흐르는 구정물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켜 깨끗해진다 해도 곧 흐름이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만약 맑은 물이 먼저 흐른다면 좀 더 나은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까?



지성을 측정하는 기준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기억하고 있으면 지성적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으면 그저 기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 없이 단순히 기억만 하는 일이라면 단순한 로봇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고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오히려 너무 많은 지식 습득으로 인해 정신적 혼란만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유언비어란 무엇일까? 아무 근거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쁜 소문을 말한다. 학식이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다거나 그대로 믿어 버린다는 건 지성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근거 없는 소문이란 다소 부족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음미하지 않고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귀가 얇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을 확인해 주어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이해할 능력조차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만 알거나 이마저 이해 못하는 무리들이 하위 그룹일 수 있다.


수년전의 일이다. 나이가 비교적 많으면서 여태 해본 일이라곤 건설현장의 노동일이 전부였던 이 남성은 경험이 전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봉사 단체에서 자금 일부를 연계된 해외 봉사 단체에 급히 송금할 일이 생겨 이 남성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경험이 전무 했던 남성은 친분이 있는 A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역량을 잘 알고 있던 A씨는 흔쾌히 도와주었다. 그런데 송금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횡령이라는 말을 하여 곧 유언비어로 삽시간에 퍼져 버렸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잘못이 드러날까 두려운 나머지 A씨에게 책임을 떠 넘겨 버린 일이 있었다.


여전히 같은 실수를 번복하고 있는데, 대인관계의 가치를 모를 정도로 미성숙하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이라는 말이 딱 이 상황인 것 같다.


세상에는 나무를 보는 사람과 숲을 보는 사람이 있다. 나무만 볼 줄 아는 사람에게 권력이 어울리기나 하는가?


어리석은 사람과 어떤 문제를 놓고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논쟁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큰 이유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항상 따라 다닌다. 가장 현명한 선택은 이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게 화를 피하는  방법이다.


이런 연유로 방해받지 않게 분리된 장소에서 선거권자들만 참여해야 하고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생리적 욕구나 탐욕에 물들어 있다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욕구가 채워질 때까지 다른 어떤 것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오직 이러한 욕구를 통제했을 때에만 순수한 지성이 드러난다.


우리는 여태 이들로부터 사회 발전에 자주 방해받아 왔다. 국민의 행복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면 지성에게 권리를 주는 게 가장 현명하다. 이들은 활발한 두뇌덕분에 실수를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바로 수정하려 한다.


이상적인 두뇌를 찾으려면 우선 뇌를 열어보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한 개인이 한 사람의 지성을 측정하기에는 측정 범위가 너무 넓어 지성 평가 시험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먼저 정신 전문의를 통해 어렸을 때 환경이 어떠했는지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격이 유년기 단계에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에 따라 선천적 성격이 형성되고, 이 단계에서 인생의 초기 경험이 일생을 좌우하게 되므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 다음은 지식이 얼마나 풍부한지, 창의력이 있는지, 직관력이 있는지, 자신에 대해 얼마큼 이해하고 있는지 등등 두뇌의 활발한 정도를 평가하고, 정기적으로 측정할 필요가 있다. 지성 평가는 환경에 따라 유동적이라서 정기적이어야 한다.


세상이 어둡고 암울하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가 없다. 빛은 어두울 때일수록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빛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는 일 뿐, 그렇게만 한다면 좀 더 밝고 건전한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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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팜스
과학 오피니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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