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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해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으로 말이야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에 가장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연인을 대신해 희생하는 장면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임신 중인 어느 여성은 난치병에 걸렸음에도 아이를 정상적으로 출산하기 위해 처방받은 약을 잠깐 끊으면 괜찮겠지 라며 생각하고 복용을 중지했다. 아이는 건강하게 출산했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의 목숨과 맞바꾸게 되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폭력에 휘말린 여성을 구출하려다 목숨을 잃는 사례도 있었다. 본인의 목숨보다 ‘이웃’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것일까?

 

한편, 이익이나 폭력 등 갈등으로 인한 존속살해도 미디어를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낳아 준 부모라 할지라도 깊어진 갈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부모는 자신의 배 속에서 낳은 자식을 네 몸같이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이게 정말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빈자와 부자

우리는 임금이 높은 자격증이나 창업을 선택하기를 원한다. 좋은 선택을 하면 현재에 만족하며 퇴직할 때까지 편안한 노후가 보장된다. 이들 삶의 목적은 오직 많은 돈을 버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학교라는 조직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행복한 삶이 아니라 오직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받는 것일 뿐 그 무엇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평생 돈 벌 궁리만 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넓고 좋은 저택에 머물 기회가 생기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아이들과 함께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더럽고 불행한 이들로부터 재물을 지키기 위해선 완전히 떨어진 지역에서 살기를 원한다.

 

경제적 위치에 있지 않으면 가난한 삶에 언제나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찾아 평생을 돈 걱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올까봐 많은 재물을 손에 넣고 싶어 하고 이게 집착이 되면 이기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이기심은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상대일 뿐이며 경쟁에 이기기 위해 더 큰 이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재물을 모아야 부자가 될 수 있다.

 

한편, 아프리카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을 겪는 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성장하기 때문에 돕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연민이며 엄연히 관심사가 다르다. 이 아이들을 선별해 교육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분명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15살 소년이 3센트짜리 췌장암 조기 발전기를 만들었다. 잭 안드라카라는 소년은 아버지 친구가 췌장암으로 사망하자 조기 발견할 수 없는지에 의문을 품고 탄소나노튜브가 췌장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자기 생각을 실현하고 싶어 200여 개의 대학에 실험실을 빌리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그중 한 곳에서 긍정적으로 실험실 사용을 허락해 줬다. 약 7개월 동안 4000번의 실패를 겪은 결과 단돈 3센트로 초저가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소년이 만든 초기 발전기는 기존 방식보다 매우 저렴하고 검사 시간도 단 5분밖에 걸리지 않아 세계과학경진대회인 인텔 ISEF에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또 단돈 몇 달러로 손목이 절단된 소년의 의수를 만든 사람도 있었다.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물건을 쥐고 악수할 수 있을 정도다. 로봇팔보다 저렴하고 기능이 뛰어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재료비는 얼마 되지 않지만,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기구에 몇백만 원의 가치를 매겨 판매하는 곳은 기업뿐이고 이익만 따진다. 하지만 모든 물건에는 비쌀 이유가 없다.

 

욕망

누구는 권력을 탐하고 누구는 연민을 느끼고 누구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욕망에서 시작하며 관심사가 달라 가난하다 할지라도 편협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가난하지만, 지혜로울 수 있는 것처럼 권력에 관심이 없지만 지성적인 사람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권리를 부여하고 차등적으로 권력이 주어진다. 이렇다 보니 정작 존경받아야 할 사람은 생계에 허덕이고 있고 기억력이 뛰어나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자들이 존경받는 세상이다.

 

이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으며 빈자와 부자의 간격이 크다는 것이 그 반증의 결과라 하겠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지성이라 한다면 머릿속의 지식은 기억력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상황이 막상 눈앞에 벌어지면 몸이 반응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과 따로 노는 것과 같다. 지성이란 몸이 기억하는 하나의 감각적 반응이며 흔히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머릿속의 지식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형님의 형수를 살리기 위해 혈액형이 다른 동생의 혈액을 수혈받았다가 끝내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의사는 혈액형이 같은 형님의 혈액으로 수혈하기로 하였으나 의사의 동의 없이 독단적 판단으로 수혈해 발생한 사고였다.

 

이 사회는 재력이 된다면 권력을 얻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만든 발명품이 재력가의 돈벌이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이에게 권력을 쥐여주면 권력을 남용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재물에 대한 탐욕이 강하면 욕망이 채워질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심이자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다.

 

하지만 욕망이 반드시 해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의 뜻은 뭘 하고 싶다거나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 싶다는 욕구로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이타적이라면 남을 먼저 생각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면 사회에 이롭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최악의 욕구이자 최고의 욕구가 될 수 있다.

 

욕망이 없으면 그저 행복할 수 있지만 인류가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욕망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타적인 욕망을 잘만 활용하면 인류에게 이로울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제라는 망상적 사고가 주입되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고 두뇌를 팔아 생계를 이어갈 처지가 되어 버렸다. 생계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어서 배가 고프면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 이 일이 적성에 맞는다면 본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겠지만 생계가 우선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코로나 팬데믹을 잘 생각해 보라. 백신 미접종자들의 직업을 빼앗고 압박하고 모든 것들을 빼앗으려 했던 그들을 잊을 수 있을까?

 

인도주의

부모, 자식, 형제 등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힘든데,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들다. 거기다 원수 같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건 죽는 것보다 싫을 것이다. 내 이웃이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고, 그리고 사상적 차이가 다르다면 사랑하기 매우 힘들 것이다.

 

인류애란 이런 것이다. 각 문화와 개인의 개성과 독특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생계 때문에 몸부림쳐 가며 악착같이 살아야 하고, 몸이 고달프고 병이 들어도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쳐가며 재물을 쫓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목적이라면 남을 배려하기 이전에 내 몸 하나 못 가눌 정도로 힘든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일 수 있겠는가?

 

현재 문제는 경제라는 개념으로 사회가 움직인다. 오직 재물을 모으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듯 허상에 사로잡혀 타인의 재물을 뺏고 빼앗기며 더 많이 가지려는 이기심만 가득하다.

 

한편, 천 년 전 조선시대 관료 월급은 얼마였을까? 요즘 공무원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직업이다. 이들이 선택하는 이유는 안정적인 직업 때문이다.

 

공무원이 월급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겠지만 월급 체계는 쌀과 콩을 급여로 주는 것인데 노비의 새경(임금)이 월평균 벼 1가마라고 본다면 쌀로 환산하면 40Kg이니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12만 원 정도가 나온다. 정1품은 쌀은 365Kg, 콩은 192Kg이고 정9품은 96Kg의 쌀과 48Kg의 콩을 받았다.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적은 금액이지만 이들은 이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리고 왕이 요구하고 원하는 바를 충실히 따랐다.

 

여기에 착안하여 일정 금액을 고정적으로 주되 어떤 임무를 주면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모든 재량을 동원해 이루려 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의 부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여 불평등, 특히 빈부격차가 심화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또 세대가 거듭할수록 부의 쏠림현상이 심해진다. 예를 들어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조건으로 10%를 받는다면 땅 주인은 집에서 놀기만 해도 수확되는 곡물의 90%를 그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더 이상적일 수 있다. 공산주의는 부의 평등이다. 한 국가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평등하게 나눠 가질 수 있어서 굶어 죽거나 불평등을 느낄 일이 없다. 하지만 생산수단이 모두 국유화되고 똑같이 분배되므로 굳이 열심히 생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다른 국가에 비해 경쟁력을 잃고 나태해져 국민 전체가 가난해질 수 있다.

 

사람들의 발전을 돕고 큰 동기를 부여하려면 공산주의보다 발전된 인도주의를 실현하는 일이 시급하다.

 

여러 그룹을 만들고 각자의 재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워준다. 이렇게 하면 성과를 통해 자주 모임을 가지게 되고 가장 뛰어난 팀을 선발하여 더 높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목표는 동일하지만 재량을 뽐내기에 충분하다. 억압하고 구속하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하게 되므로 그 사람이 가진 재능을 최대로 끌어내려면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좋다. 자유로움이 많아야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목표라는 건 함께 풀어나가야 할 논의로 의견이나 주제일 수 있다.

 

한편, 인류애를 느낄 만큼 충분히 성장한 사람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 인류애에 가깝다면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인간애를 넘어 세계의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류애에 도달하려면 상당한 이해력과 지식이 필요하다. 또 마음이 모든 면에 열려있을 때만 가능하다. 다양한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이 있으므로 확실히 마음이 열려있다는 증거이며 인성이나 인격에도 문제 되지 않는다. 이정도의 인물이라면 강제성이 없어도 저절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오늘날의 권력자들은 이익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거나 무관심하고 또 귀찮아한다. 관심이 없으니 뭐가 불공평한지 모른다. 자기 손으로 남을 미워하게 만들고 따돌리고 가난하다고 차별하고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의 믿음

확실히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몸이 경직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는 편이다. 이들에게는 다툼이 일상이고 폭력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부자들은 쾌적하고 넓은 곳으로 피해 이민을 가거나 높은 담장을 만들어 경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담장은 마음의 벽을 만들므로 갈등을 키우는 요인이다. 적어도 서로가 행복해지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시키면서 아이에게 온갖 사슬을 채워, 그가 맛보지도 못할 이른바 그 행복이라는 것을 미래에 보장한다는 미명 아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런 야만적인 교육은 중지되어야 한다.

 

인간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유대관계를 쌓고 나누는 마음을 통틀어 일컫는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생활의 여유가 없고 놀이와 즐거움이 없는 각박한 세상에 누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 세계가 쾌적한 곳이 되려면 적어도 모두가 여유로워야 한다. 항상 시간에 쫓겨가며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할 정도로 바쁜 일상 때문에 주변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고 아이와 놀아줄 시간도 없으니, 유대관계를 올바로 형성하지 못한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를 가질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결혼하면서 매일 전쟁 같은 바쁜 일상에 지쳐 버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외되고 마음이 닫혀 몸이 경직되어 버린다. 어느 날 문득 뒤 돌아보니 이미 늙어버린 자신과 훌쩍 커버린 아이들뿐이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정작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다. 왜 태어나는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제대로 된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이럴 바에야 멋지게 살다가 죽자는 심정으로 위험한 일에 관심을 두거나 아무런 목적 없이 그렇게 방황하며 막살다 간다. 그래서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일탈을 꿈꾸는 이들은 꽤 많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 그 뿌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심지가 곧아 쉽게 퇴색되지 않고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몇천 년이 지나도 종교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가 굳은지 알려면 어떤 식으로든 시련이 닥쳐야 한다. 평범한 일상에선 확인할 수 없다. 스스로 심지가 강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꽤 많은데, 그들은 내면의 불안을 감추려고 일부러 센 척을 하는 것뿐이다.

 

막상 자기에게 큰 시련이 닥쳤을 때 일단 살고 보자는 심상으로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둘러댄다. 하지만 어려움을 피하면 더 큰 화가 미치는 법이다. 그래서 굳은 심지가 중요하다.

 

종교라는 건 위아래 없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뿌리가 사랑이고 단단하니 우리의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마음을 갖게 해준다. 어려울 때나 슬플 때 마음을 달래줄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듯 정신적인 위안이 되고 든든한 마음의 후원자가 되어줄 울타리가 필요하다. 울타리란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마음도 흔들리고 불안해지는 법이므로 가정이 우선 평안해야 하며 서로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정부도 믿지 못하겠고 주변도 그렇고, 심지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다면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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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코코넛 팜스
과학 오피니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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